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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정윤주
통영 장학생

정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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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JU JEONG

"한국인은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어야 된다"

1918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953년 미국 공보원 영화 제작소원, 공보부 영화 제작소에서
각각 음악 및 녹음을 담당, 1965년 영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단장을 지냈고 한국 작곡가 협회 회장을
역임한 뒤 1997년 7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원래 토목과를 전공하였던 그는 하숙집 친구들과 우연히 음악콩쿠르를 관람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정윤주는 성악가를 꿈꾸게 되어 성악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서 수많은 작곡가들의 전기 가운데 성악가의 전기가 한권만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다시 작곡의 꿈을 키우게 되고 당시 조선인 최초의 콩쿠르 입선자인 임동혁에게 찾아가 4년간 작곡을 배우게 된다.

해방 이후 고향 통영으로 내려와 7년간 통영중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하였고 이후 주한미국공보원(駐韓美國公報院) 음악 담당과 문공부 국립영화제작소(國立映畵製作所) 음악담당 활동을 하며 경험을 쌓아 현대음악기법을 영화음악에 사용하여 여러 걸작을 남겼다. 그 중, 무용조곡 "까치의 죽음"으로 1957년 한국음악협회(韓國音樂協會) 제1회 작곡상을 수상하였고 1961년·1962년·1964년·1982년에 영화 "연산군"·"지옥문"·"벙어리 삼룡이"로 제1·2·4·21회 대종상 음악상, 1962년 영화 "상록수"로 제9회 아시아영화제 음악상, 1964·1965년 영화 "성춘향"·"갯마을"로 부일영화상, 1967·1973년 영화 "사경장의 아이들"·"만선"으로 청룡영화제 음악상, 1977년과 1978년 제1회·제5회 한국작곡가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인은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어야 된다”는 소신을 갖고 한국의 전통음악을 현대적인 음악으로 재창조하는데 주력했던 정윤주는 국악과 남도민요를 좋아했으며, 동피랑에서의 남망산 전경과 통영만이 지닌 바다의 모습 등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 이후 때를 맞추어 의욕적인 경력을 쌓아간 한국의 중견 작곡가들 중에 정윤주는 아마도 가장 재능 있고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된 작곡가로 우뚝 서 있다.
1954~1955년 사이에 있었던 그의 3악장 심포니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양산된 형식으로는 가장 강렬한 작품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콘서트와 무대작품들은 그의 독창성과 장인정신을 보여준다. 게다가 특선작품 - ‘문화영화’와 기록영화 두 분야를 아우르는 영화음악의 다재다능한 작곡가이다.
그것은 정씨가 대다수 그의 동료들과는 달리 해외경험이 전혀 없으며 주로 한국에서 독학을 했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다.